위안스카이는 누구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싱하이밍 중국대사 발언에 대하여 조선의 국정을 간섭했던 청나라 위안스카이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한 나라의 대사의 언행을 지적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했던 위안스카이는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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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배경

위안스카이는 1859년 9월 16일 중국 허난성 수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간병인이었고, 경찰인 삼촌은 아들이 없어 양아버지가 됐다. 고위 관리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진 명문 가문 출신인 위안스카이의 가문은 카미조 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망명 및 군사 경력

1876년 원은 하남향으로 유배되었고, 1879년 다시 과거에 응시했으나 또 다시 쫓겨났다. 이러한 실패에 이어 우창경의 지휘 아래 청군에 입대하여 군사적 기량을 과시하며 인정을 받았다. 위안은 링우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군 복무를 계속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참여

1882년 임오란이 일어나자 원은 오창경과 함께 조선으로 파견되어 상황을 안정시켰다. 반란에 연루된 흥전대 병사들을 납치해 청나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했다. 1884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개화파 김옥균이 이끄는 가신정에게 납치되자 원은 일본군과 싸워 고종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중국으로 귀국했으나 1885년 8월 흥센군단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의 업적으로 위안은 한국에서 인정을 받았고 국무총리, 서울 주재 협상통상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내정간섭

위안스카이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한국의 국내 및 외교 문제를 조정하고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일본, 러시아와 경쟁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패전하자 위안은 북양군벌을 창설하고 천진 부근에서 서구식 군대를 양성하여 정계 진출의 기틀을 마련했다.

중국 정치에서의 역할

1898년 백일 개혁 기간 동안 위안은 처음에 개혁가들의 요청을 받았지만 결국 그들을 배신하여 그들의 정책을 좌절시켰습니다.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산둥성 태수가 되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외세를 보호하고 반란을 진압하여 열강의 신임을 얻었다. 1901년 장이홍이 죽자 위안은 그를 이어 총독이 되어 권력을 확대했다. 그는 직접 통제하에 새로 설립된 군대를 강화하고 독립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대통령직과 권력 강화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위안은 다시 군정권을 되찾았고 결국 총리가 되어 청나라를 장악했다. 그는 청나라의 군사력과 혁명군의 허약함을 예견하고 혁명세력과 접촉하여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1912년 3월 그는 임시 총통이 되어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중화민국을 공식적으로 조직했다.

반대와 독재의 진압

황제가 되려는 위안의 야심은 1915년 5월 일본의 21차 개편 요청을 받아들이고 제국 지위를 추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반대와 반원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고, 그 결과 영국, 러시아, 일본과 같은 강대국은 제국 제도를 폐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1916년 3월 제국주의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위안스카이는 후속 사건의 혼란 속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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